순흥 척화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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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본문
순흥 척화비(順興斥和碑)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,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하는 쇄국 의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국에 세운 비석 중 하나입니다. 1871년(고종 8) 신미양요 직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서울 종로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로변에 건립되었습니다.
건립 배경 및 목적:
- 쇄국 정책 강화: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의지를 굳히고, 쇄국 정책을 강화했습니다.
- 국민 경각심 고취: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, 국민들에게 쇄국 정책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했습니다.
내용:순흥 척화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.
- 큰 글자: "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(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)"
- 뜻: "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이고,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."
- 작은 글자: "개아만년자손병인작신미립(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)"
- 뜻: "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.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우다."
형태:
- 장방형이지만 윗부분은 둥글게 반원형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.
-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된 이중 기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.
- 비신의 높이는 120㎝, 폭은 47㎝, 두께는 14㎝로 비교적 작은 편입니다.
위치 및 변천:
- 현재 위치: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순흥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있습니다.
-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의 요구로 대부분의 척화비가 철거될 때 땅속에 묻혔다가, 1940년대 중반경 순흥초등학교 남쪽 길가에 다시 세워졌습니다.
- 이후 순흥초등학교 정문과 뒤뜰을 거쳐 1990년 12월 순흥면사무소(현 순흥면행정복지센터)로 옮겨졌습니다.
의의:순흥 척화비는 서양 열강의 간섭을 배척하고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.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.
순흥 척화비 - [유적/문화재]에 관한 문서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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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본 정보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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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름 | 순흥척화비 |
한자 표기 | 順興斥和碑 |
종류 |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|
지정 번호 | 242 |
지정일 | 1991년 5월 14일 |
주소 |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 67 (읍내리)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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